'스마트폰' 없이 여행을 떠났다[남기자의 체헐리즘]
본문 바로가기

콩씨뉴스

'스마트폰' 없이 여행을 떠났다[남기자의 체헐리즘]


부두(埠頭)에 누워 햇볕을 쐬고 있었다. 만성 결핍이었던, '비타민D'가 충만해졌다. 찡그려 못생겨진 얼굴도 상관 없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어 홀로 자유로웠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 가끔 지나가는 갈매기 울음소리가 다였다. 한없이 평화로웠다. 해변 이름이 '와온(臥溫)'이라던데, 무슨 뜻일까 생각했다. 당장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스마트폰이 없었기에. 

손목시계를 보니 오후 4시30분. 서울 가는 기차 시간이 1시간40분쯤 남아 있었다. 슬슬 버스타러 갈 요량으로 자릴 떴다. 도로변 슈퍼로 가서 아이스크림 2개를 집었다. 좋아하는 '옥O자'와 '스O류바'였다. "현금 밖에 안된다"하기에 다시 가져다 놓으니, 욕구불만이 생겼다. 꾹 누르고 주인 아주머니에게 "버스 언제 오느냐"고 물었다. 무려 5시20분에 온단다. 기차역에 도착하면 6시15분 정도, 출발 시간이 빠듯했다. 택시를 타려 하니, 그것도 비슷하게 기다려야 한단다. 

서울 시내버스처럼 자주 올 거라 짐작한 게 오산이었다. 그만큼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다. 바닷가를 즐기던 낭만이 썰물처럼 밀려갔다. 기차를 놓칠까 초조해졌다. 주인 아주머니는 "아이고, 어떡한대"란 말만 반복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기사를 끝까지 보면 나온다(기사 고정).


여하튼 다소 낯선 여행을 하고 있었다. 아무 준비도, 계획도 없었다. 주머니엔 '스마트폰'도 없었다. 최소한의 '정보'마저도 포기했단 뜻이다. 뭐랄까, 그러니까 좀 깔끔하지 않은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게 더럽게 다니고 싶단 뜻은 아니다.

쉽게 말해 '완벽한 정보'를 갖고, 계획대로 딱딱 떨어지는 게 싫었달까.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대다수가 추천하는 여행지에 간다. 당연히 사람이 많다. 북적이는 사람들과 부대끼느라 사진에 사람이 더 많이 찍힌다. 그리고 꼭 후기가 좋은 맛집에 간다. 가서는 필수 메뉴를 시킨다. 이를테면 그런 것들에 좀 지쳤었다. 나만의 '보물' 같은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게 심하게 효율이 떨어지고, 헤매고, 고생할지라도. 

'돈 들여 사서 고생하는 게 아닐까' 생각에 주저하기도 했었다. 그때 확신을 준 건 그간 여행이 남긴 추억들이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 유명하다며 찾아간 카페는 어딘지 잘 기억이 안 났다. 그런데 길가다 우연히 봤던 성당 인근 한 카페. "안경 쓴 바리스타가 왠지 커피를 잘 내릴 것 같다"며 들어갔던 그 곳. 거기 라떼가 정말 최고로 맛있었다. 올 봄 제주에 갔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유채꽃이 아니라, 숙소서 아내와 '끝말잇기'를 했던 일이었다. 날씨도 궂으니 들어가서 쉬자고 했다가, 이상한 단어의 열거에 몸살날 만큼 웃었었던. 

그런 이유로 더위가 스멀스멀 몰려오던 어느 봄날, 맘 먹은대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날짜는 5월14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날씨가 화창해 좋았다. 떡진 머리를 대충 감고, 옷은 가볍게 입기로 했다. 좋아하는 반팔티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었다. 오랜만에 입었더니 뱃살이 자유를 갈구하며 저항했다. 별 수 없이 숨을 '흡' 하고 들이마신 뒤, 단추를 잠갔다. 냉혹했다. 순간 뭉크의 '절규' 그림이 떠올랐다. 가방서 노트북을 빼고, 기자수첩과 펜 하나를 넣었다. 스마트폰을 끄고, 손목시계를 찼다. 단촐한 여행 준비가 끝났다. 

바깥에 나와 서울역으로 향했다. '기차여행'이 하고 싶었다. '덜컹덜컹' 바퀴소리를 음악 삼아, 창 밖을 보며 사색을 하고, 시원한 사이다에 삶은 계란을 까먹고(사실 이게 핵심). 어디로든 갈 참이었다. 가능한 낯선 곳으로 가고 싶었다. 

여정의 시작은, 홀가분하기보단 사실 좀 불안했었다. 이런 여행은 난생 처음이라서. 서울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혹시 못 돌아오는 거 아냐?', '얘깃거리가 없으면 어떡하지?', '기사는 어떻게 쓰지?' 그런 물음들이 꼬릴 물었다. 

서울역에 도착해 지나가던 남성에게 가서 물었다. "혹시 기차타고 갔던 곳 중에 좋았던 데 있으세요?" 40대로 보이는 남성은 날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바쁘다"며 갔다. 괜찮았다. 거절당하기에 익숙한 나니까('거절당하기 50번'…두려움을 깼다, 2018년 11월24일자 기사 참조). 

서울역 안내데스크 직원들이 눈에 띄었다. 다가가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난색을 표하다 잠시 웃더니, 생각에 잠겼다. 한 직원은 "망상(강원도 동해시)이 좋았다"고 했다. 20대 때 동해 여행을 가며 가본 데였다. 어마무시한 양의 짜장면을 먹었던 기억이 났다. 

또 다른 직원은 "전남 순천"이라고 했다. 안 가본 곳이라, "순천은 뭐가 좋았느냐" 물으니 "와온 해변이 좋았다"고 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거기가 그렇게 좋냐"고 하자 "개인적으로 좋았다"며 배시시 웃었다. 그 미소가 왠지 좋았다. 그리고 발음할 수록 동글동글한 모음(이응) 발음들. 이런 이유로 여행지를 정하는 건 처음이었다. 

중략 바로가기